발레 불새는 1910년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러시아 동화 '불새'를 모티브만 가져왔고 대본과 안무는 미하일 포킨이 맡았으며, 음악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했다. 당시 무명이던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유럽에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20세기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럽을 놀라게 한 발레뤼스
20세기 초, 전 유럽을 놀라게 한 러시아의 발레단 발레뤼스를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끌었던 발레뤼스는 완벽한 예술적 기교와 풍부하고 생명력 넘치는 표현성으로 콧대 높은 파리의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발레뤼스의 춤은 러시아적 감수성을 통해 발레를 한층 더 높은 예술의 경제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세기말 우아함과 매너리즘에 갇혀 쇠퇴해 가던 발레는 러시아의 발레뤼스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발레뤼스에서는 바츨라프 니진스키, 안나 파블로바, 타마라 카르사비나, 올가 스페시브체바 등 발레계의 전설로 불리는 무용수들과 혁신적인 안무를 통해 새로운 장을 열게 한 천재적인 안무가 미하일 포킨, 레오니트 마신, 조지 발란신 등을 배출했다.
또한 당대의 러시아의 뛰어난 예술가들 중 발레뤼스 무대와 인연을 맺지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파리와 유럽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발레뤼스의 춤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에 대한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 새로운 것에 감각은 이른바 유럽이 알지 못했던, 유럽과는 너무나 다른 유럽 동에서 아시아 끝까지 펼쳐진 광활한 평원의 세계, 새로운 세계 러시아의 강렬한 활기였다. 즉, 그것은 바로 러시아적인 것의 감각이었다.
발레뤼스가 1910년 여름 파리에서 공연한 발레 <불새>는 세련되었지만 노쇠하고 메말라가던 서유럽문화에 피로감을 느끼던 파리 관객에게 바로 '러시아적인 것'의 역동성과 열정을 느끼게 하면서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던져주게 된다. 원시적이고 거칠고 본적이지만 생명력 넘치고 역동적이며 자연스러운 춤은 파리의 관객에게 그야말로 발레의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디아길레프의 예술 수출 기획
발레뤼스의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발레뤼스 창단 이전에도 이미 예술 사업가로서 러시아 예술을 서구에 알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디아길레프는 몇 차례 전시회와 오페라 등을 개최하며 유럽이 잘 알지 못했던 러시아 예술을 파리에 소개하게 된다. 러시아와 프랑스 정부 및 고위층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은 전시회와 공연기획은 크게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계속되기를 기대했던 러시아 오페라 시즌은 뜻하지 않게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디아길레프는 당시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드는 발레를 생각해 내었다. 디아길레프는 당시 프랑스와 친선우호관계를 맺는데 열심이었던 러시아 황실의 도움을 받아 황실극장으로부터 무용수들을 모아 파리로 데려가게 된다.
1909년 이렇게 발레뤼스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발레뤼스가 처음 파리에서 공연했던 작품들은 물론 놀라운 테크닉과 예술성으로 극찬을 받았지만 동시에 자존심 강하고 까다로운 파리 언론과 비평계로부터 '동양적 이국성'이나 '민족적 색채'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 유럽에 '러시아적 재능'을 보여주기를 원했던 디아길레프는 파리관객의 요구에 부응할 무언가 독창적이고 러시아적인 것을 담아낸 발레를 만들어낼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다. 디아길레프는 당시 발레뤼스와 함께 작업을 시작한 작곡가 아나톨리 랴도프에게 음악을 청탁하며 이런 편지를 쓴다.
"저에게는 발레인 동시에 러시아적 발레인 것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최초의 러시아적 발레죠. 이전까지는 그런 것이 없었으니까요. 러시아적 오페라, 러시아적 교향곡, 러시아적 노래, 러시아적 춤, 러시아적 리듬은 있어요. 하지만 러시아적 발레는 없죠. 리브레토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포킨이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우리 모두의 꿈, <불새>입니다."
랴도프는 발레뤼스의 이전 작품들에 참여했던 작곡가였지만 그의 잔잔하고 우아한 음악은 <불새>의 분위기에 적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강렬하고 역동적인 생명력 넘치는 '러시아적인 것'을 담아낼 발레 <불새>의 음악을 써줄 작곡가를 찾던 디아길레프는 우연히 스트라빈스키의 관현악 작품 <불꽃>을 듣게 된다. 그는 환호하며 "이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안무가 포킨 역시 스트라빈스키를 알아보았다.
"나와 디아길레프는 이 음악에 사로잡혔다. 여기에 내가 <불새>를 위해 기대했던 바로 그것이 있었다. 이 음악은 불꽃을 뿌리며 타오른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발레의 불타오르는 형상을 위해 기대했던 것이다."
디아길레프는 곧바로 당시 파리에 있던 스트라빈스키에게 발레 <불새> 작곡을 의뢰했고 스트라빈스키는 바로 열렬히 호응했다. 스트라빈스키는 1909년 <불새>의 전체적인 얼개를 구상한 뒤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디아길레프에게 완성하는 대로 조금씩 악보를 보냈고 포킨은 이를 기초로 안무를 했다. <불새>의 음악은 이듬해 봄 드디어 완성되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완성된 <불새>는 1910년 6월 25일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시즌'에 파리의 그랑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었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파리 상류사회 전체가 극장에 모인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 모리스 라벨, 클로드 드뷔스 등 문화계의 저명인사들은 모두 연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무명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여러 차례 커튼콜을 받으며 당대 음악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처럼 당시 무명의 신예 작곡가였던 스트라빈스키는 발레뤼스를 통해 일약 세계적인 작곡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적인 것이 무엇인가
불새의 무엇이 그토록 러시아적인 것을 느끼게 했을까?
첫째, 그것은 불새의 새로운 춤이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발레에 새로운 춤을 도입하여 발레의 개혁을 꿈꾸었던 안무가 포킨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고전발레의 전형적인 동작에 거칠지만 강렬한 민속춤과 자연스러운 몸동작을 결합한 새로운 발레를 안무했다. 이러한 새로운 발레에서 파리 관객들을 원시적 생명력을 느꼈던 것이다.
둘째,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었다. 파격적인 화성과 리듬을 사용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서 파리 청중은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움을 느꼈던 것이다. 대위법을 사용하지 않은 채 집요하게 이어지는 멜로디, 격렬하고 빠른 리듬의 불규칙한 향연 등으로부터 강렬한 색채감과 이국성에서 그들이 원하던 '진정으로 러시아적인 것'을 느꼈던 파리청중은 열렬히 환호했다.
셋째, 러시아 민담과 설화에서 가져온 불새의 이야기, 그리고 레프 박스트와 알렉산드르 골로빈이 만든 강렬하고 이국적인 의상과 무대 또한 넘쳐나는 원시성과 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특히 주인공 불새의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원시와 문명에 의해 건드려지지 않은 시초의 생명력에 대한 상상력을 환기하는데 충분했던 것이다.
불새의 춤은 동양성(오리엔탈리즘)이 품은 생명력 및 활기를 통해 고갈되어 가던 유럽 문명에 새로운 문명적 대안을 암시해 주었다. 유럽적 러시아는 거칠지만 생명력이 있는 동양적 러시아를 통해서만이 완전한 세계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고전 발레의 유럽적인 우아한 몸으로부터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었던 발레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타오르는 불과 같은 강렬한 생명의 역동을 가진 동양적인 몸을 받아들임으로써 되살아났던 것이다.
"지금까지 제정 러시아 발레는 프랑스와 서구에서 우선적으로 영감 받았지만, <불새>는 그 흐름을 극적으로 되돌렸다. 이제부터 러시아 발레는 자신의 슬라브적 과거에서 실마리를 얻게 될 것이었다."(제니퍼 호먼스)
불새의 의상을 디자인했던 박스트는 이렇게 선언했다. "미개 예술의 꾸밈없는 형식들은 유럽 예술이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길이었다."라고요.
불새의 출현은 문화사적으로 놀라운 순간이었다. 한 문화사 가는 표트르 1세의 서구를 향한 창이 이제 갑자기 동쪽을 향한 것이라고 평했다. 불새의 형상에 담긴 러시아적인 것에서 유럽인들은 현대 문명이 나아갈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러시아를 휩쓴 전쟁과 혁명으로 발레뤼스의 구성원들은 유럽과 신대륙의 각국으로 퍼져 나아가 그곳에서 러시아 발레의 유산을 전했다.
비록 발레뤼스는 해체되었지만, 20세기 이후 발레의 역사는 발레뤼스가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발레뤼스의 레퍼토리는 세계 각지의 무대에서 여전히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불새> 역시 영원히 강렬한 러시아적인 것의 영감으로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