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셰익스피어의 희곡
16세기말 창작된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수많은 발레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이야기의 배경이 르네상스 초 이탈리아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프랑스나 러시아 같은 발레 종주국의 위상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나 미국이나 영국처럼 그 대열에 들어서고 싶어 했던 입장 모두 선점하고 싶어 하는 소재였다.
사람들을 사로잡지 못 한 실패한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발레뤼스도 일찍이 로미오와 줄리엣에 사로잡혔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영국의 작곡가 콘스탄트 람베르트이 음악으로 발레화에 도전했다. 1926년, 러시아 발레의 신화였던 바츨라프 니진스키의 여동생이었던 브로니슬라바 니진스키야가 안무를 맡았다. 하지만 이 공연은 레퍼토리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로미오와 줄리엣이 발레로 기억되는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 탄생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발레곡 덕분이었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권유로 스키타의 모음곡 <어릿광대>, <방탕한 아들> 등의 발레곡을 작곡해 온 프로코피예프는 모더니즘적 형식 실험보다는 낭만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세기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1935년, 러시아 땅에 이 작품의 초연이 올라가기까지는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일찌감치 미국과 유럽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프로코피예프는 1930년대 중반 영국 귀국을 진지하게 고려한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 혁명 이후 망명한 예술가들로 포화상태가 되며 성공적인 활동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오랜 타지생활이 녹록지 않았던 프로코피예프도 계획되었던 공연이 연이어 무산되어 낙담했다. 이때 영화사 렌필름 예술감독이자 레닌그라드 오페라발레국립학술극장의 자문이었던 아드리안 피오트롭스키로부터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발레화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세르게이 라들로프가 이 기획에 동참하게 되면서 이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해피엔딩으로 끝내보자는 대담한 기획에 뜻을 함께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번째 시사 연주는 실패로 돌아갔다. 대중도 당국도 고전의 전복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와 발레 <맑은 시냇물>이 각각 음악이 아닌 혼돈, 거짓 발레라는 공공연한 비난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혁명으로 권력을 얻은 이후 더 이상 또 다른 변화를 주장할 필요가 없었던 정권은 예술계의 계속된 실험정신을 탐탁지 않아 했다. 형식주의자라는 비난에서 그 어떤 예술가도 자유롭지 못했다. 아무도 해피엔딩이 된 로미와 줄리엣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대숙청이 정점에 이르렀던 1937년 이 기획의 발의자 중 하나였던 피오트롭스키가 첩보활동을 의심받아 처형된다. 아무래도 이 야심 찬 기획의 현실화는 불가능해 보였다.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으로 토슈즈를 신게 된 건 러시아 밖에서였다. 이 작품의 주요 부분을 발췌한 모음곡을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발레안무가 이보 바냐 프소타가 1938년 고국인 체코의 브루노 국립극장에서 단막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초연에 참석하지 못했다. 1936년 이미 소련으로 영구 귀국한 프로코피예프와 그의 가족은 당국의 특별한 허가 없이는 출국금지가 된 상황이었다. 프로코피예프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난 건 체코 초연 후 2년 뒤, 지금은 페테르부르크에 키로프 극장(현재 마린스키극장)이었다.
1940년 러시아 초연된 라브롭스키의 안무
러시아 무대에서의 <로미와 줄리엣> 초연은 안무가 레오니드 라브롭스키를 비롯한 창작자들의 뜨거운 논쟁과 긴밀한 협조 속에서 탄생했다.
당시 예술가들은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에 대해서 노골적인 거부감을 내비쳤다. 낯선 리듬과 육중한 구성이 전통 발레 음악의 규범을 벗어난다고 여겼다. 프로코피예프 또한 작품에 대한 수정요구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연이 끝나자 악보일부가 자신의 허락 없이 수정되었다고 주장도 한다. 하지만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라브롭스키는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엄중하고 거친 음색을 더욱 강조하여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긴장감을 극대화시켰다. 몬테규 가문과 케플러 가문의 오랜 반목은 물론 그들을 둘러싼 당대 사회의 불안한 분위기 또한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
안무가 라브롭스키와 줄리엣 역의 갈리나 올라노바 1944년 볼쇼이 극장으로 옮겨온 후 다시 공연되기 시작한 이 작품은 1954년 레오 아른쉬탐의 연출로 영화화되어 이듬해 칸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다. 이후 영국 코벤트 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에 올려진 1956년 초청 공연은 러시아 발레를 영국에 소개한 역사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박수갈채가 1시간 넘게 지속되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만하다. 당시 영국 최고의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은 갈리나 울라노바의 줄리엣 연기에 감동한다. 영국발레에 부족한 것이 부족한 것 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올라노바는 이 공연으로 러시아 발레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다.